허지웅의 진솔한 생각을 담담하게 전하는 책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작가가 악성림프종이라는 병을 앓고 난 뒤 발표한 첫 책으로, 2020년 작품이다. 아프기 전에도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이야기하던 작가였지만, 이번 책의 문장들은 결이 많이 달라진 버팀이다. 이전에 그는 항상 날이 서 있었고, 늘 무언가에 저항하는 글을 써 왔다면, 이번에는 조금 타협의 길을 택한 모습이랄까. 아니, 택했다기보다 그저 그렇게 변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더 유연해진 사고와 유해진 문장이 독자들에게도 더 편안하게 다가갈 것 같다.
이 책과 관련된 강연에서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또한 인상적이었다. 닉슨과 비트겐슈타인을 예로 들어,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그 굴레에 빠져 실패한 삶과,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해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삶을 비교한 것인데, 그 비교 역시 투병 생활 전과 후의 그의 모습인가 싶어 이야기가 더 진솔하게 느껴졌다.
어떤 것에서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버리고 그 결론에 상황을 끼워맞추는 것으로 쉽게 포기하지 말고, 놓치고 있을 가능성들을 눈여겨보며 작은 결심들을 동기로 버티어 나가자는 이야기, 그리고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매달려 삶을 소진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미래에 방점을 두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이야기, 크게는 이렇게 두 가지로 읽히는 책이다.
이 책 이후로 올해 2022년 그는 또 <최소한의 이웃>이라는 산문집을 발표했지만, 당시에는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쓴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특히 젊은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적었다고. "살아라."라는 말로 끝을 맺는 이 책이 당시에 읽었다면 무척 아팠겠다 싶었고, 뒤늦게 읽게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덮었다.
어떤 책들은 첫 장부터 이렇게...
"망했는데. 세 번째 항암 치료를 하고 나흘째 되는 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여기서부터 벌써 더 읽을 수 있을까... 마음이 안 좋았다. 어떤 책들은 이렇게 첫 문장부터 마음을 헤집어 놓는데, 나도 이제는 많이 덤덤해져서 조금 망설이다가 금세 다시 책장을 넘겼다.
다행히 투병에 관한 이야기는 초반뿐이고 뒤쪽은 그저 공감이 가는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모든 문장에서, 모든 생각들에서 그의 투병이 느껴졌다. 죽다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마음에, 그저 공감이 아니라 깊이 알겠는 마음이 더해져서 문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읽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어떤 건지 너무 잘 알겠어서.
힘든 일을 겪고 나서 개인적으로 더 힘들었던 게 그 마음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거였는데, 어떤 일은, 그러니까 모두가 흔히 겪는 그런 일이 아닐 경우에는, 그 화두 자체가 상대까지 힘들게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이전에는 남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들을 때 딱히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라 난감했던 경험이 많아 충분히 이해가 되어, 더 괜찮은 척 아예 말을 꺼내지 않게 되니, 마음속으로만 쌓이는 그 마음들은 오로지 혼자만의 몫이 되었다. 관련해서 무언가 그나마 쓸 수 있게 된 게 요즘인데.. 잘 버티는 일에 대해서, 그러나 크게 애쓰지 않고 같이 흘러가는 방법에 대해서 공감가는 문장이 많았던 책이다.
책 속 문장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p.22~23)
이기는 경험을 쌓는다는 건 언제 힘을 주고 뺐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는지 근육의 쓰임과 호흡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과 같다.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뭐가 진짜 이기는 거고 지는 건지조차 구분이 어려워진다. 되는 놈만 늘 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p.34)
3차 항암을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망가져 있다,는 말을 내가 얼마나 쉽고 편하게 써왔는지 그때 깨달았다. ...머리털과 눈썹이 사라진 건 고통 축에도 끼지 못했다. 단 하루만 통증이 없이 잘 수 있다면 평생 머리털과 눈썹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p.39)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p.45)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당신이 <라라랜드>에 무너져 내렸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p.60)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몸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의 내 상황에선 맞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틴다는 것이 혼자서 영영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당신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동지가 필요하다. (p.108)
대부분의 성공에는 운이 따른다. 반면 실패는 악운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패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직면한 실패가 자연스런 결과로써의 실패인지, 혹은 의도에 의한 음모와 배신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나라는 인간의 형태는 눈앞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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