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공기를 읽는 책, <도쿄 큐레이션>
오랜 시간 잡지사의 패션 에디터로 일하던 저자는 대기업 마케팅 부서로 이직했다가 별안간 도쿄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여행지가 아니라 생존의 터전으로 도쿄를 맞닥뜨린 저자가 6년 동안 관찰하고 살아낸 도쿄라는 도시를 이 책 속에 담았다.
책의 첫 장을 넘기면 '들어가 봐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는 문구를 맨 처음 만나게 된다. 마치 마음에 드는 가게 밖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듯, 통유리 너머로 어느 가게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사진과 함께. 이 첫 페이지가 앞으로 펼쳐질 이 책의 여정을 한눈에 말해주는 듯하다.
그저 훑어보는 여행책이 아닌 도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본, 그 안에서의 저자의 경험과 취향들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의 구성 역시 여행책에서 주로 사용하는 지역별 분류가 아닌, 저자의 경험 위주의 공간, 브랜드, 디자인 이야기가 기준이 된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형태_도시 콘텐츠와 자연이 이루는 문화
2. 빛_ 취향으로 빛나는 물건과 숍
3. 풍경_ 도쿄 생활자로서의 일상
4. 맛_ 로컬들만 가는 진짜 맛집
5. 사람_ 지금, 도쿄를 만들고 있는 크리에이터들
BEYOND Tykyo_ 도쿄에서 떠난 여행
다음번 나의 도쿄를 위해 아껴 읽을 책!
어떤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때로는 굉장히 사소한 우연에 기인하기도 한다. 내가 일본어를 배운 계기가 그랬다. 10여 년 전 처음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어리바리한 여행자들을 위해 자신은 빙글 돌아가는 길임에도 기꺼이 길을 안내해준 어떤 일본인, 일본인들이 친절하다는 얘기야 워낙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바로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으니!
결과로, 매년 신년계획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영어보다, 심지어 대학 4년을 공부한 어떤 유럽어보다(ㅎㅎ) 일본어가 내게는 더 익숙한 언어가 되었다. 그 뒤로 일본 여행이 더 재밌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나 도쿄는 감성 여행지로 인기가 많은 곳이라, 그동안에도 도쿄에 관한 책은 단순 여행서를 넘어서는 독특한 컨셉의 책들이 많았지만, 이번 책이 단연 나의 베스트가 될 것 같다.
책을 처음 받아든 순간 일단 디자인에 반하고 구석구석 꼼꼼하게 신경 쓴 내지 곳곳의 요소들과 단아한 사진들에 또 한번 반했다. 내용은 솔직히 저자의 개인적인 성향과 취향이 워낙 뚜렷하게 드러나서 챕터마다 약간의 호불호가 있긴 하나, 책의 컨셉 자체가 저자의 6년간의 도쿄 생활 기록이니 어쩌면 당연한 부분이겠지.
"누구보다 브랜드의 탄생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에디터로서, 6년 동안의 도쿄 생활자로서, 도쿄 로컬의 삶이 지닌 빛과 그림자를 균형감 있는 시선으로 담았다."는 책 소개글처럼, 기존의 시선과는 다른 새로운 도쿄를 만날 수 있는 책, 여행하듯 조금씩 아껴 읽으며 다음번 나의 도쿄를 기대한다.
책 속에서
누군가의 집에 들어서듯 활짝 열린 대문을 통과하자마자 나를 반긴 건 정원 가득 빼곡히 들어선 분재였다. 겨우 몇십 년 된 나의 나이테를 가볍게 비웃듯 몇백 년은 족히 이 지구를 살아내고 견뎌낸 자태에는 뭐랄까, 어떤 말로도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한 정렬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p.37)
작품을 모두 걷어낸 채 하얗게 텅 빈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오롯이 마주한다는 건 매우 기묘한 경험이다. 화장을 지운 연극배우의 얼굴처럼,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평일의 도시처럼 생경했다. 그것을 허락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에게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방향을 완전히 틀어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p.48)
노출 콘크리트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안도 다다오는 건물 그 자체가 주변 환경에서 독보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을 잘한다. 안도 다다오 이후 세대인 구마 겐고는 반대로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건축을 추구한다. 환경에 녹아들어 마치 환경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하는 건축이다. (p.86)
도쿄의 앤티크 마켓은 일본인의 얼굴을 참 많이 닮았다. 마켓은 비단 낡은 물건만을 늘어놓은 장소가 아니다. 영감을 채집하고 주인들과 도란도란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며 흘러간 시간에 지긋이 눈을 맞추는 곳. (p.119)
동네 자치회가 소상공인들과 합심하여 시간과 품을 들여 함께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이 지도에는 구글 지도가 말해주지 않는 것이 있다. 자신의 숍에 대한 자부심, 숍을 낸 터전인 마을에 대한 애착과 애정이다. 비단 자신의 매장뿐 아니라 내 옆의 매장, 우리 마을이 함께 번영했으면 좋겠다는 공통된 소망의 반영이다.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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