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 9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작별인사>
지난 5월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신작이다. 작가의 네임벨류에 걸맞게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것은 물론, 4개월 만에 20만 부 판매를 돌파하며 한국문학 대표 작가로서의 저력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 책은 2019년 작가가 어떤 전자책 플랫폼의 청탁을 받고 쓴 짧은 소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기계의 시간>이라는 가제로 2020년 초 한정된 독자들에게만(해당 플랫폼의 회원들에게만) 공개된 이 소설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약간의 수정을 거쳐 바로 일반 독자들에게도 선보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의 시작으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팬데믹이 글의 수정 작업에도 영향을 끼쳐, 처음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와 달리, '삶이란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이야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막바지 작업에서 제목까지 <작별인사>라고 바뀌었다고 한다.
아빠와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평범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던 주인공 철이. 비 오는 날 아빠를 마중 나갔다가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어떤 수용소로 끌려간다. 정체성의 근간을 뒤흔드는 가혹한 현실에 갑자기 내던져진 철이의 이야기 속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다.
<작별인사> 서정적 제목 이면의 휴머노이드
이 책은 제목만으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근미래의 '휴머노이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나 역시 이야기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탓에 책장을 넘길수록 당황스러웠다. 가까운 미래, 이미 통일이 된 대한민국의 평양이 주요 배경이고, 사람들은 생활의 편의를 위해 휴머노이드를 구입하고, 아이를 낳는 대신 아역배우를 닮은 휴머노이드 아이를 입양하는 세상이다.
미래 기술에 관한 서술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 책은 과학서가 아니라 소설이니까. :) 주인공 철이의 이름에서 어쩐지 '오징어 게임'의 영희도 생각났지만(ㅎㅎ), 주인공의 아버지는 철학의 '철'에서 따와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들의 이름도 '칸트', '갈릴레오', '데카르트'다. 마찬가지로 중간쯤부터 '달마'라는 이름의 중요 인물도 등장한다. 기계로 스캔해 보지 않으면 휴머노이드와 인간을 구분하기 어렵게 된 세상,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세상, 이런 세상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를 물었을 때, 작가의 대답이 주인공들의 이름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런 고도의 정신세계 못지않게, 육체의 고통이나 육체가 없이 정신만 영생을 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 이어진다.
"그럼 김 박사는 자기 뇌를 업로드해서 인공지능과 같이 영생할 거야?"
"그럼 최 박사는 안 할 거야? 안 할 이유가 없잖아. 우리의 의식을 업로드하면 그 의식은 육체 없이도 지금과 똑같이 살아갈 거야. 사유하고 연구하고 토론도 하겠지."
책 속 두 주인공의 위 대화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육체가 없는 의식의 영생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오래 생각해보게 한 책이었고, 여전히 쉽게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책 속 문장
자작나무 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 그 두 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p.9)
그는 20세기 초반의 건물들 사진 여러 장을 보여주었다. 내가 학교라고 본 건물은 공장이었고, 공장이라고 생각한 건 교도소였다. 상상하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20세기의 인간들은 붉은 벽돌과 회색 콘크리트를 좋아했던 것 같다. (p.22)
그런데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휴머노이드가 가능하려면 기억이라든가 연산 기능 같은 것은 평범한 인간 수준으로 제한하고, 대신 공포나 후회, 기쁨 같은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야 돼. 그러려면 휴머노이드는 인간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하지. 삶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모든 감정에 절실해지니까. (p.85~86)
설계자들이 휴머노이드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요소를 프로그래밍한 것은 단지 그것들이 더 잘, 문제없이 오래 작동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였지만, 그 결과로 이들은 궁지에 몰린 인간들처럼 잔인하고 무정하게 자기 생존을 도모하는 데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그럴 때 그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 되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어쩌면 이들도 인간이 심어놓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신까지 믿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p107)
몸이 지칠 때 나의 정신은 휴식할 수 있었다. 팔과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일 때, 비로소 생각들을 멈출 수 있었다는 것을 몸이 없어지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p242)
여전히 육신이 없는 영생을 바라지 않는다고,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을 직시하는 데에서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육신 없는 삶이란 끝없는 지루함이며 참된 고통일 거라고도. (p268)
가끔 내가 그저 생각하는 기계가 아닐까 의심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고 안도하게 된다. 봄꽃이 피는 것을 보고 벌써 작별을 염려할 때, 다정한 것들이 더 이상 오지 않을 날을 떠올릴 때, 내가 기계가 아니라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럴 때 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지 않고 바로 여기, 현재에 있다. 그렇게 나를 현재로 이끄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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